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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by tree_s 2022. 3. 31.

 

두 사람 사이에 피어난 건 사랑이었을까? 어떤 관객들은 그리 믿었겠지만 오히려 샬롯과 밥은 더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매말라 부서러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삶 속에 있다. 샬롯은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워하고, 특별한 재능없이 평범한 존재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보며 겁내고 있다.

중년의 밥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회의와 절망으로 침잠하고 있다. 그 위태로운 인생의 모퉁이를 돌며 둘은 우연히(?) 만난다.

첫 만남은 오해였다. 밥은 샬롯이 자기를 보고 환히 웃었던 걸 기억하지만 샬롯은 밥을 기억하지 못한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거나 극적인 만남이라는 생각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기혼자인 두 사람은 이미 그런 환상에 사로잡힐 나이는 아니다.

오히려 출발선을 지난 레이스의 어떤 지점에서 타는 목마름을 참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섣부른 불장난이 없다. 충동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무척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선다.

밥을 친구들과의 모임에 초대한 샬롯은 밥에게 '길을 잃으면 전화해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미묘한 관계가 처음 싹트던 그 때부터 둘은 서로 그런 부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들이 키워가는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임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밥은 커다른 세단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인파 속을 걷고 있는 샬롯을 발견한다. 밥은 샬롯을 뒤쫓아 가 그녀를 돌려 세운다. 그리고 따뜻이 안아준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무언가를 확인한다. 샬롯은 눈물을 보이고, 밥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 앉지만 이내 웃으며 작별한다.

그들이 확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둘은 포옹한 채 어떤 말을 주고 받은 것일까? 영화의 중심에는 바로 그것이 있다. 그것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영화의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자신은 잘하는 게 없고 너무 평범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낙담하던 샬롯에게, 밥은 그렇지 않다고, 앞으로 잘 될 거라고, 계속 글을 쓰라고 말해 주었다. 밥은 떠났지만, 샬롯에게는 밥의 진심, 밥의 위로, 밥이 전해준 용기가 남았다.

밥은 젊고 아름다운, 조금은 길을 잃은 샬롯과 지내며 잃어버렸던 젊음의 생기를 기억해낸다. 한 때 그가 부인에게서 느꼈던 기쁨과 열망,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웃으며 나누던 이야기들. 밥에게 있어 샬롯은 그의 아내를 비추는 구리 거울과 같았다.

흐릿하게만 비치는 형상 속에서, 밥은 자신이 잃어버린 어떤 것을 맹렬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샬롯 역시 다정한 밥을 통해 그의 남편이 주지 못했던, 마땅히 주었어야만 했던 그 무엇을 간절히 찾고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인지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말하는, 소통되지 않는 관계를 밥과 밥의 아내, 샬롯과 샬롯의 남편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생각해보면 밥과 샬롯이 가까워진 가장 큰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이국 땅에서 유일에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였다는 데 있다.

밥은 CF 촬영장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감독의 말은 밥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다. 통역사를 거치며 희석되고 축약된 말들은 밥을 당황케 한다.

샬롯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샬롯은 나름대로 타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곳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만 이내 실패한다. 오락실에서 신기한 오락을 하는 사람들은 서커스 광대처럼 기괴해 보일 뿐이고 신사에서 만난 스님의 독경은 샬롯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있어 이런 소통의 단절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다름 아닌 각각의 '부부사이'였다. 아내는 지구 반대편에 가 있는 남편에게 국제우편을 보내 원하는 카펫 색을 고르도록 배려한다. 그러나 밥은 어떤 것이 와인색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사실 그런 일 따위 어찌 되건 알게 뭔가 싶은 태도마저 내비친다. 모든 것이 낯설어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아내는 그런 밥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채 사무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샬롯 또한 남편이 자신을 더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길 바라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하는 일 없이 호텔에서 빈둥대는 부인이 뭐가 힘들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두 사람의 외로움과 답답함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시작되었다. 두사람의 만남,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의 뭉게 구름.

​영화가 끝나갈 무렵, 샬롯의 남편은 사랑을 가득담은 편지를 팩스로 보내고, 밥의 부인은 남편을 걱정하며 넌지시 염려의 마음을 전한다. 그들의 짧은 연애가 출구에 가까워졌을 무렵 둘은 그렇게 목적지, 서로의 돌아갈 곳을 확인하고, 실패를 향했던 그들의 짧은 연애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실패'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예감하고, 또 목표했던 실패.

마땅히 실패해야만 하는 일이라 해도, 그 실패를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진부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양 스스로의 감정과 상황을 부풀려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수월한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패를 지켜냈다. 짧은 포옹과 키스 후 두 사람이 이내 웃으며 작별할 수 있었던 건 서로에 대한 감사, 그리고 격려의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삶은 이런 실패들로 얼룩져 있다. 알게 또 모르게. '어른'이란, 이처럼 실패에 능숙한 사람을 일컫는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밥과 샬롯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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