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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_ 단상들

by tree_s 2022. 4. 22.


○ 가후쿠의 가정은 언뜻 화목해 보인다. 화목의 외피 안에는 격랑이 일고 있다. 그것은 아내의 불륜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불행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죽은 딸의 기일, 아내(오토)는 괴로움에 몸을 떨며 겨우 버텨내는 모습이다. 가후쿠는 평온해 보인다. 오토처럼 괴롭지 않아서는 아니다. 가후쿠는 모범적인 가장인가? 아니 그는 행복한가? 나는 ‘어떠해야 하는가’가 아닌,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 이 질문은 영화를 관통한다.

○ 녹내장. 점차 시야가 좁아지는 병. 가후쿠가 볼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녹내장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실명 직전인 경우가 많다. 그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덕분에 자신의 병을 알게 된다. 오토의 죽음은, 어떤 면에선 자동차 사고와 닮아 있다.

○ 오토는 섹스를 통해 오르가즘을 느낀 후, 현실이 아닌 세계에 발을 딛는다. 오토가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장소. 그 세계는 감각과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 오토는 불륜을 무릅쓴다. 삶을 견뎌내기 위해. 그리고 죄책감이 쌓여가고 있다. 오토는 이야기를 통해 가후쿠에게 자신의 진실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오토는 가후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동시에 가후쿠를 철저히 배신한다.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게 된 와타리의 어머니가, 두 개의 자아로 삶을 견뎌냈던 것과 같다.

○ 오토는 사고를 당한 가후쿠 대신 차를 운전하며 말한다.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당신과 결혼해 다행이라고. 그녀의 말은 온전한 진실이자 완전한 위선이다. 분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오토에게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가후쿠는 그저 ‘고맙다’(아리가또)라고 말한다. 오토는 분열된 채로, 가후쿠는 분열되지 않은 채로 침잠해 간다.

○ 가후쿠는 진실에서 비켜서 있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내의 불륜”이 아니라,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다. 언어가 아닌 모든 것을 통해 가후쿠와 오토는 진실을 주고 받고 있다. 그러나 '발화'되지 않은 진실은 육체를 얻지 못한 영혼처럼 공중을 맴돈다.

○ 가후쿠는 오토가 들려준 야마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오토는 가후쿠에게 진실의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놓는다. 하지만 가후쿠는 준비돼 있지 않다.

○ 오토는 오르가즘을 느낀 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아침이 되면 자기가 말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가후쿠는 말했다. 오토는 다카츠키에게도 야마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편이 잊어버렸다고 거짓말한 칠성장어 이야기까지. 오토는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 칠성장어는 다른 물고기의 피를 빨며 생을 이어간다. 오토는 칠성장어다. 오토는 바위에 붙어 당당히 죽어가는 칠성장어가 되고 싶다. 하지만 혼외정사를 반복하며 연명하고 있다.

○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야마가의 이야기 후반부를 들려준다. '야마가'는 자신의 침대 위에 선혈이 낭자한 시체가 놓여 있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소녀'는 참을 수 없었다. '야마가'의 집에 찾아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소녀가 야마가에게 직접 진실을 고백하는 것은, 상징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토는 '발화'를 통해 진실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진실에 육체를 입혀주기로.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가후쿠는 오토를 잃는다. 가후쿠는 오토의 부재에 갇혀버린다

○ 가후쿠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배우들이 각자의 언어로, 소통 불가능한 대사를 읊도록 지도한다. 그의 직업이자 예술관이다. 배우들은 그의 작업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통하지 않는 말로써 소통의 기적을 바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가? 의문을 품고 있다. 가후쿠는 한결같다. 좀 더 천천히, 그리고 명확히 대화를 이어가도록 지시한다. 가후쿠는 체홉이 배우들의 내면을 읽어내기를 기다린다.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 연극 연습이 무르익었을 무렵, 수어를 하는 소냐(이유나)와 중국어를 하는 엘레나(재니스) 사이에 무언가 일어난다. 그 기적을 이끈 가후쿠는 오토의 진심을 온 몸으로 밀어내며 살았다. 오토와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 감각의 소통을 이어가던 다카츠키는, 유나와 재니스 사이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가후쿠에게 묻는다. 가후쿠는 대본이 당신을 읽어낼 것이며, 당신은 진지하게 답하면 된다고 말한다. 정작 가후쿠는 체홉이 자신의 삶을 읽어내는 것을 견딜 수 없다.

○ 가후쿠는 와타리에게 운전을 맡기고 싶지 않다. 일본에서는 장남을 조수석에 태우는 문화가 있다. 장남이 장성하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를 몰아야 한다. 가족 모두를 차에 태운 채로. 운전석을 넘기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 가후쿠는 운전석을 와타리에게 넘긴다. 와타리는 죽은 자신의 딸과 나이가 같다. 가후쿠는 자신의 차가 오래되고 길들어 있어 다른 사람이 운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와타리는 능숙하게 차를 운전한다.

○ 와타리는 가후쿠처럼 자신만의 고통 속을 살아가고 있다. 소냐(이유나)의 대사와 같이, 고통속에 있는 것은 바냐(가후쿠)만이 아니다. 가후쿠에게 와타리는 거울과 같다. 가후쿠는 와타리를 통해 진실의 뒷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와타리도 그렇다.

○ 와타리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가후쿠는 오토가 녹음한 카세트 테잎을 듣는다. 가후쿠(바냐)는 말한다. ‘당신(오토)은 내 인생을 망쳤어. 내겐 진정한 삶이 없었어. 너 때문에 인생의 제일 좋은 시절을 허송세월로 다 보냈어. 넌 내 원수야. 철천지 원수’

○ 가후쿠는 윤수-이유나 부부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윤수는 유나와 소통하기 위해 수어를 배웠다. 유나는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에 살기를 결단했다. 유나는 개를 키운다. '발화'가 아닌 세계에서도 사람과 개는 서로를 지킨다.

○ 윤수는 자신이 유나의 말을 100인분 만큼 들어주기로 했다고 한다. 충분할 리 없다. 하지만 언어장애가 있는 유나에게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건 일상적인 일이다. 실은 유나만이 아니다. 모두 마찬가지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몸을 섞는 사이에서도, 몸만 섞는 사이에서도.

○ 유나는 체호프의 글이 내면에 들어와 몸을 움직이게 해줘 행복하다고 말한다. 체호프의 일갈처럼, 두려운 것은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 진실을 모르는 상태이다. 가후쿠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다카츠키가 온몸으로 진실을 마주하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 가후쿠는 오토를 잃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했다. 가후쿠가 두려워했던 것은 오토일까? 다카츠키는 타인의 진심을 제대로 보는 일이, 보는 이에게 괴로움을 더할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만큼은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거라고 가후쿠에게 말한다.

○ 가후쿠는 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고, 오토는 끝내 진실에 형상을 입혀주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단절되었고, 외로웠고, 괴로웠다. 가후쿠는 훌륭한 가장인가? 가장은 무엇인가? 가족은 무엇인가? 그가 두려워 피한 것은 행복을 지키기 위함이었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애쓴 자리는 왜 두려움으로 가득한가?

○ 와타리의 무너진 집을 바라보며, 가후쿠는 미뤄온 질문에 답한다. 얼굴에 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와타리를 안은 채, 살아가자고, 상처받았지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 체홉은 가후쿠를 읽어냈다. 돌아보면, 체홉이 가장 먼저 읽어낸 것은 오토였다. 체홉은 가후쿠의 삶 안으로 스며든다. 그의 삶은 다시 연극 속에 녹아들고, 연극은 관객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든다. 객석 가운데에는 와타리가 앉아 있다.

○ 와타리는 '발화'로 소통되지 않는 이국 땅으로 왔다. 유나의 개를 데리고, 가후쿠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죄책감처럼 붙들고 있던 뺨의 상처는 사라졌다. 와타리의 삶이 쉬울 리만은 없다. 와타리는 살아간다. 뒷자리에 개를 태운 채 도로 위를 달린다. 상처받았지만, 계속 살아간다. 영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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